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로이 전쟁 (문단 편집) === [[그리스-튀르키예 관계]]의 시발점? === 어디까지나 지역만 보고 말하는 거지, 튀르키예의 조상인 튀르크(돌궐)족은 한참 후에야 지금의 튀르키예 땅에 오므로 진지하게 '그리스 vs 튀르키예'라 볼 수는 없다. 고대까지만 해도 아나톨리아 반도에 튀르크족 따윈 없었으며, 이들이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 근처로 오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이천 년'''쯤은 지나 [[셀주크 제국]] 때부터였다.[* 그나마 11세기 무렵부터 아나톨리아에 진입한 튀르크족의 주된 정착지는 주로 동부 내륙이었고, 트로이가 위치한 서부 해안지대는 동로마제국이 수백년간 더 지켜냈다. 즉, 트로이가 위치한 지역 자체가 튀르크화된 것은 트로이 전쟁(기원전 1190년 전후로 추정)으로부터 대략 2500년 후의 일이다.] 지금의 튀르키예 땅을 튀르크인들이 가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부터이다. 물론 단순히 DNA상으로만 보면 현대 튀르키예인들은 백인인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과의 지속적인 혼혈로 인해 황인인 원시 튀르크인의 피가 거의 희석되었으며 그에 따라 현대 튀르키예인들은 트로이인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의 후손이므로 이런 관점에서는 그리스 vs 튀르키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혈통이 같다는 게 곧 민족이 같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으며[* [[멕시코]]의 사례이긴 하지만, [[아즈텍 제국]]과 [[틀락스칼텍]]이 같은 나와틀계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별개의 국가이면서 적대관계이기까지 했던 사례가 있다.] 적어도 오스만 제국 이후의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은 언어, 문화적으로 튀르크족에 동화되었을뿐더러, 튀르키예 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는 튀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튀르크적 정체성이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을 그리스 vs 튀르키예로 보는 건 그저 드립으로서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사실 트로이 전쟁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 조사 등으로 그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신화상의 전쟁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했고, 트로이 전쟁 이후 [[바다 민족]]의 대규모 침략 등으로 지중해 구성원 자체가 갈려 버리는 등의 암흑기가 도래하여 사실상 고대 그리스든 트로이든 민족성이 희석되어 버렸으므로 현대의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입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 지역을 정복했던 지배층은 이 전쟁에 자신의 세력을 대입하여 정당성을 주장하곤 했다. 일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메흐메트 2세]]가 '''나는 트로이의 복수를 했다'''고 선언한 것. 그러나 이것도 알고 보면 참 어이없는 소리인데,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은 자신들을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겼고, 로마는 자신들을 트로이의 생존자인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고 여겼다.[* 더 재미있는 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슐리만은 [[신성 로마 제국]]의 후신 [[나치 독일]]의 탄생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라는 사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소위 '게르만 민족주의' 열풍에 힘입어 스와스티카 무늬를 아리안 민족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이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후 "짐은 트로이의 복수를 했도다."라고 말했다는 일화의 출처는 코르푸섬의 베네치아 지방관 필리포 다 리미니(Filippo da Rimini)가 친구 프란체스코 바르바로(Francesco Barbaro)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 하나뿐인데, 함락 당시 리미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참사의 현장을 생생히 증언한 게 아닌 그저 세간에 떠도는 카더라 통신을 끄적인 것에 불과했다.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술탄이라는 사람이 하기아 소피아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마치 '한 마리의 포악한 짐승처럼(like a savage beast)' 도시의 처녀를 마구 강간하고는 "아테나 신전에서 강간당한 [[카산드라|트로이 처녀]]의 복수다!"라고 말했다는 거. 실제 메흐메트 2세는 도시 약탈을 예정보다 빠르게 중지시킨 뒤 하기아 소피아를 신성한 공간으로 취급한 채 그곳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임명했다. 게다가 이 일화대로라면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를 그리스로 봤다는 얘기인데, 정작 그는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인식한 채 그 정당한 후계자가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로마 황제'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화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럽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 건 이슬람 군주의 잔혹성을 선전하고 그리스 신화에 흠뻑 빠져들었던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과거 그리스가 저질렀던 '트로이의 함락'과 대비해서 본 탓도 있었다.[* Marios Philippides, 『The Siege and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Historiography, Topography, and Military Studies』] 게다가 그리스인 역시 현대 그리스인과 트로이 전쟁 시기 그리스인과 차이가 크다. 트로이전쟁을 포함한 그리스 신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미케네]]문명의 시기로, 미케네인들은 도리아인의 침략을 받아 문명이 붕괴하고,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고대 그리스 시기가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